1 고구려의 발전
기원전 2세기 이전에 성읍국가로 출발한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동부여에서 내려온 기마민족 주몽 일파에 의해 한층 규모가 큰 연맹왕국으로 발전했으며, 정치적 주도권을 계루부가 장악하였다. 그러나 계루부 이외에도 고구려에는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의 네 부족이 있어서 5 부족이 서로 연맹을 맺었다.
고구려가 발전하려면 졸본 지방의 산골을 벗어나 넓은 들이 있는 남쪽으로 영토를 넓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기원후 3년에 수도를 졸본에서 압록강가의 국내성으로 옮겼다. 이곳은 뒤에 환도성이 가로막고 남쪽으로 압록강이 트여 방어에도 좋고, 밖으로 진출하는 데도 유리한 지형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1세기 후반에서 2세기 전반의 태조왕은 근 100년간 집권하면서 안으로 계루부 고씨의 왕위세습권을 확립하여 태조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동으로 함경도의 옥저를 복속시켜 후방 기지를 확보하고, 서쪽으로 요동과 현도 군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2세기 후반 고국천왕 때에 이르러 왕권은 더욱 안정되고, 중앙집권도 한층 강화되었다. 먼저 부족적인 전통을 지녀온 5부는 이제 수도와 그 주변 지역의 행정단위를 의미하는 동, 서, 남, 북, 중의 방향을 표시하는 5부로 개편되었으며, 과거 5부의 족장들은 중앙귀족으로 편입되었다. 왕위계승도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뀌었으며, 절노부의 명림 씨가 왕비족으로 정해졌다. 또 고국천왕은 한미한 신분 출신의 을파소를 국상으로 채용하여 진대법을 실시하고 소농들을 보호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이들이 귀족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막았다.
내치가 안정되면서 외치도 강화되었다. 3세기 전반 동천왕은 압록강 입국의 서안평을 공격하여 중국과 낭랑 군의 통로를 차단하려 하였는데, 이것이 위를 자극하여 동천왕 18년에 관구검에 의해 환도성이 함락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다음 해에는 또 왕기의 공격을 받아 동천왕이 멀리 동해안까지 피난하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 후 위가 망하고 3세기 후반 진이 들어선 이후, 4세기 초부터 5호 16국의 북방 족의 침입을 받아 곤경에 처하자 고구려는 다시 힘을 얻어 요동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는 한편, 4세기 초 미천왕 14년에 남쪽으로 대동강 유역의 낙랑군을 공격하여 드디어 이를 차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평양 일대를 차지한 것은 장차 고구려 성장의 큰 밑거름이 되었다.
중국과 공방전을 계속하던 고구려는 4세기 중엽 고국 원왕때 북방 족의 하나인 전연 모용황의 침입을 받아 궁궐이 불타고, 미천왕의 시체가 도굴당하고, 왕의 생모와 남녀 5만 명이 포로로 잡혀가는 국난을 당하였다. 뒤이어 고국원왕 41년에는 남쪽에서 북진정책을 펴도 있던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을 받아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비극이 생겼다.
그러나 고국원왕의 뒤를 이은 소수림왕은 다시 국가체제 재정비에 착수하여 불교를 수용하고, 유교 교육기관으로 태학을 설립하였으며, 율령을 반포하였다. 이는 고구려가 중국의 고급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한층 수준 높은 고대 귀족국가로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소수림왕 때 다져진 내치는 다음 광개토왕과 장수왕대의 웅비를 가져오는 바탕이 되었다.
5세기 초의 광개토왕은 18세의 젊은 나이에 왕이 된 후 대규모 정복사업을 벌였다. 지금 국내성 부근에 우뚝 선 <광개토대왕비>는 왕의 위업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문자 그대로의 기념비이다. 이 비에 의하면, 왕은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 땅을 차지하고 북쪽으로 숙신을 정복하였으며, 남쪽으로 백제를 쳐서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왜국의 침략을 받은 신라를 도와 왜병을 낙동강 유역에서 섬멸하는 등 일생 동안 64개의 성과 1,400개의 촌을 동파했다. 왕은 대국을 건설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연호를 세워 영락이라 하고, 죽은 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5세기의 장수왕은 79년간 재위하면서 부왕의 정복사업을 계승하여 고구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왕은 중국이 남북조시대로 분열된 정세를 이용하여 남조와 북조 사이에 등거리 이교를 펼치면서 중국을 견제하였다. 그리고 427년에 수도를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옮겼다. 평양은 국내성과 비교가 되지 않는 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고조선과 낙랑군의 현란한 중국문화가 꽃피었던 지역이었으므로, 이때부터 고구려는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문화적으로 난숙한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고구려 본래의 강인하고 검박한 기질을 상실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지는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장수왕의 평양 천도는 백제와 신라에 위기감을 주었다. 백제는 433년 신라와 동맹을 맺고, 472년에는 중국 북조의 위에 사신을 보내 군사원조를 청하였다. 그러나 장수왕은 475년에 백제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였다. 백제는 이에 수도를 금강 유역의 웅진으로 옮겼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신라의 죽령 일대로부터 백제의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만주까지 판도에 넣어 중국과 당당하게 자웅을 겨루는 대국으로 성장하였다. 신라영토인 충북 중원에서 발견된 고구려 비는 이곳이 고구려의 판도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고구려는 스스로 천하 대국임을 자부하면서 신라를 동이라고 멸시하기도 하였다.
2. 백제의 건국과 발전
백제도 건국 설화가 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의하면, 기원전 18년에 주몽의 아들 비류와 온조 형제가 10명의 신하를 이끌고 마한 땅으로 내려갔는데, 형 비류는 바닷가인 미추홀에 자리 잡고, 동생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백제국을 세웠다. 이 전설은 부여족의 한 갈래가 고구려 건국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한강 유역에 내려와 두 파가 경쟁하다가 위례성에 자리 잡은 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백제를 세웠다는 사실을 설화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출처: 다시 찾는 우리 역사(고대. 고려) 제1권
'역사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삼국의 성립과 발전(4, 5) (1) | 2023.03.03 |
|---|---|
| 삼국의 성립과 발전(3) (1) | 2023.03.01 |
| 열국의 병립(4,5) (0) | 2023.03.01 |
| 열국의 병립(2, 3) (0) | 2023.02.25 |
| 열국의 병립(1) (0) | 2023.02.24 |
댓글